
카이트 실드
Kite Shield · 연 모양의 대형 기사 방패
카이트 실드(Kite Shield)는 10~13세기 유럽의 기사가 들었던 대형 방패로, 위쪽이 둥글고 아래쪽으로 길게 뾰족해지는 연(kite, 카이트) 모양에서 이름을 얻었다. 높이가 100~120cm에 이르러 말 위의 기사의 왼쪽 어깨에서 무릎까지를 한 면으로 가렸고, 그래서 노르만 기사가 정착시킨 무거운 기마 돌격에서 왼편의 적의 창과 화살을 한꺼번에 막는 한 면의 벽 노릇을 하였다. 가벼운 나무(주로 보리수와 버드나무)의 널을 어긋매껴 붙인 합판 위에 가죽을 씌우고 가장자리를 쇠띠로 두른 다음, 안쪽에는 팔을 꿰는 끈 에나르므(enarmes)와 어깨에 거는 기지(guige)를 달아 들고 다니기 좋게 하였다. 표면에는 점차 가문의 문장이 또렷이 그려져, 사슬갑옷과 투구로 얼굴을 가린 기사가 누구인지 멀리서도 알아보게 하였으며, 그래서 카이트 실드는 유럽 문장학(heraldry)이 본격적으로 자라난 그 표면 노릇도 함께 하였다.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를 수놓은 바이외 태피스트리에 노르만 기사와 앵글로색슨 부사령관(허스칼)이 같이 든 모습으로 가장 또렷이 남아 있다.
기원
카이트 실드의 기원은 10세기 비잔티움 제국의 중기병에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가장 많다. 비잔티움의 상아 조각과 마드리드 스킬리체스 연대기 같은 11세기 자료에는 위가 둥글고 아래가 뾰족한 큰 방패를 든 기마병의 모습이 이미 보이며, 비슷한 모양이 곧 남이탈리아에 자리잡은 노르만에게 옮겨가, 11세기 중반에는 유럽 서부 전역의 표준이 되었다. 1066년 노르만의 잉글랜드 정복을 수놓은 바이외 태피스트리에는 양 진영의 거의 모든 기사가 카이트 실드를 들고 있고, 같은 시기 1차 십자군(1096~1099)의 자료에도 십자군 기사의 표식으로 카이트 실드가 나타난다. 12세기에는 더 길고 가는 '아몬드(almond) 방패' 변형도 함께 쓰였고, 13세기 중엽에 이르러 위의 둥근 부분이 평평하게 깎여 더 작고 가벼운 히터 실드(heater shield)로 바뀌면서, 카이트 실드는 본디의 자리를 그 후예에게 넘기고 차츰 물러났다.
외형·특징
- 위쪽이 둥글고 아래쪽으로 뾰족한 연 모양
- 높이 약 100~120cm로 어깨에서 무릎까지 가림
- 기마 돌격에서 왼편을 한 면으로 막는 설계
- 보리수·버드나무 합판에 가죽을 씌우고 쇠띠로 두른 층상 구조
- 팔에 꿰는 에나르므와 어깨에 거는 기지의 양면 손잡이
- 가문 문장을 그려 기사의 신원을 멀리서도 알리는 표면
스토리
카이트 실드는 11~13세기 유럽 기마전의 핵심 장비로 쓰였다. 기사는 왼팔에 에나르므를 꿰어 방패를 안정되게 들고 오른손으로 창을 잡았으며, 말 위에 앉은 자세에서 방패의 뾰족한 끝이 자연스레 왼쪽 무릎과 종아리까지 내려와, 적이 노리는 말의 옆구리와 기사의 다리를 같이 가렸다. 1066년 헤이스팅스에서 노르만의 윌리엄과 그 기사들이 든 방패가 카이트 실드였고, 같은 전장 반대편의 앵글로색슨 허스칼 일부도 둥근 방패와 함께 카이트 실드를 들고 싸웠다. 십자군 시대(1096~1291)에는 카이트 실드가 유럽 기사의 한 표식이 되어, 다마스쿠스와 안티오키아의 전장 어느 곳에서도 같은 모양으로 나타났다. 보병에게도 같은 모양이 쓰였지만, 무게와 길이 탓에 보병의 손에서는 큰 부담이 되어, 그들은 차츰 더 작은 둥근 방패와 후일의 버클러로 옮겨 갔다.
약점
카이트 실드의 가장 큰 약점은 크기에서 비롯한 무게와 옹색함이다. 길이가 약 1m를 넘는 큰 방패라 말 위에서 한 면으로 가리기에는 좋았으나, 땅 위에 내리면 발 사이에 끼어 잰 발놀림을 막았고, 좁은 통로와 비탈에서는 도리어 짐이 되었다. 위쪽은 둥글고 아래는 뾰족하여 정면에서 오는 공격은 잘 막았지만, 위에서 비스듬히 내려오는 도리깨와 도끼의 일격에는 둥근 방패만큼 빠르게 받지 못했고, 오른편을 가리려면 방패를 가슴 앞에 비스듬히 가져와야 해 그동안 왼편이 도리어 트이는 단점이 있었다. 13세기 들어 판금 갑옷이 발달해 다리와 어깨가 따로 보호되기 시작하면서, 굳이 어깨에서 무릎까지 가리는 큰 카이트 실드를 들 까닭이 줄었고, 더 작고 가벼운 히터 실드가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문화·역사적 의미
카이트 실드는 유럽 기사도의 형성기와 짝을 이루며 자라난 장비이며, 그 평평한 표면은 곧 유럽 문장학(heraldry)이 본격적으로 자리잡은 자리이기도 하였다. 12세기 초까지 사슬갑옷과 투구로 얼굴을 가린 기사들은 멀리서 누가 누구인지 가릴 길이 없었기에, 방패에 그린 색과 문양으로 서로를 알아보게 되었고, 그것이 자라 가문의 문장이 되었으며, 1130년대 무렵 영국과 프랑스에서 처음 세습 문장이 카이트 실드의 표면에 자리잡았다고 본다.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를 수놓은 바이외 태피스트리(11세기 말)는 양 진영의 기사 거의 모두가 카이트 실드를 든 모습을 가장 또렷이 전해 주고, 13세기의 마치에요프스키 성서와 다른 채색 사본에는 카이트 실드를 든 기사들이 도시를 공격하는 장면이 빼곡히 들어가 있다. 후일의 영국 왕가의 사자 세 마리 문장도 결국은 카이트 실드의 후예인 히터 실드 위에서 굳어진 것이다.
대중문화 등장
카이트 실드는 11~13세기 유럽 기사를 다루는 거의 모든 영화·사극·게임에 빠지지 않는 표식이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2005)의 십자군 기사와 《아이언클라드》(2011)의 13세기 잉글랜드 기사가 든 큰 연 모양 방패가 가장 또렷한 시각의 상징이며, 영국 사극 《바이킹스》와 《라스트 킹덤》은 노르만 시대의 직전과 같은 시기를 다루며 카이트 실드의 자라남을 함께 보여 준다. 전략 게임 《Medieval II: Total War》, 《Crusader Kings III》, 《Mount & Blade II: Bannerlord》는 노르만·십자군 기사의 핵심 장비로 카이트 실드를 두었고, 액션 게임 《Assassin's Creed》 시리즈와 《For Honor》에서도 11~12세기를 본뜬 진영의 표식으로 자주 등장한다. 다만 영화는 흔히 카이트 실드를 14세기 백년전쟁까지 무리하게 끌고 가는 시대착오가 적지 않다.
재미있는 사실
- 1066년 노르만의 잉글랜드 정복을 수놓은 바이외 태피스트리(11세기 말)에는 양 진영의 거의 모든 기사가 카이트 실드를 들고 있어, 이 자수 벽화는 카이트 실드가 그 시대 유럽 기마전의 표식이었음을 가장 또렷이 전해 주는 사료가 된다.
- 사슬갑옷과 투구로 얼굴을 가린 기사를 멀리서 분간하기 위해 방패의 색과 문양이 자라난 것이 유럽 문장학의 시작이며, 1130년대 무렵 영국과 프랑스에서 처음 세습 문장이 카이트 실드의 표면에 자리잡았다고 본다.
- 13세기 중엽에 이르러 카이트 실드의 위 둥근 부분이 평평하게 깎이며 더 작고 가벼운 히터 실드(heater shield)로 자연스레 옮겨갔고, 후일 영국 왕가의 사자 세 마리 문장은 그 후예인 히터 실드 위에서 굳어졌다.